나의 인생글

세알수제비

늘 은혜로운 2021. 8. 15. 21:52

새알수제비

배 현 공

얼마전 직장후배가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다. 복잡한 현직에서 퇴직한 선배를 챙기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는 그동안 인생을 잘 살았는 것 같아 어깨가 어쓱했다. 남편에게 오늘은 특별한 식사약속이 있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였다. 예쁜 옷입고 가라. 후배들 선물도 챙겨라. 남편은 모처럼의 나의 설레임에 공감 해줄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역하다. 좋은 사람과 밥한끼 같이 하는 행복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음식을 떠올리면 두명의 친구가 추억속에서 불쑥 걸어나온다. 상반된 친구다 한 친구가 따뜻한 동남풍이라면 한 친구는 폭풍한설이다. 두친구 다 나의 인생을 세차게 흔들어 놓았다.

 

여고 때 지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전용 기사님이 운전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아버지가 법조인이라는 소문을 얼피 들었다. 나는 가난한 유학생으로 변두리 허름한 문간방을 얻어 자치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연탄불을 갈았고, 새벽에 일어나 석유곤로에 밥을 지어 도시락을 쌌다. 반찬은 늘 김치였다. 어느날 점심시간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었고 지현이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과 요란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점심을 즐겼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면서 묘한 분위기가 느꼈졌다. 무슨 일이지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지현이가 내앞에 본인의 반찬통을 들고 서 있었다. 하나 남은 소고기 장조림 한 덩이를 내 도시락에 얹어준다. 너무도 감사했다. 자세히 보니 내려놓은 고기는 온통 비계덩어리다. 실수로 비계덩어리가 들었던가 보다. 함께 식사하던 친구들이 숨을 죽이고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가난한 고학생 이라고 앝잡아 본 것 같아 가슴 저 밑에서 불쾌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나는 얼른 집어 먹으며 고마워하고 아무일도 없는 듯 남는 도시락을 먹었다. 나에게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를 모르지만 너무도 자연스런 나의 행동에 지현이도 잠시 당황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황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싸늘한 바람이 분다. 그 친구의 짖꾸은 장난 덕분에 나는 더욱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였고 그 당시 여성으로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수 있었다. 그때의 잠시나마 불쾌했던 기억이 나서 지금도 음식을 나눌때는 좋은 것은 남에게 주는 습관이 생겼다.

 

지현 이를 생각하면 항상 명옥이가 함께 떠오른다. 명옥이는 시골의 고향친구다. 중학교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10여리 길을 걸어서 함께 학교에 다녔던 친구이다. 자영업으로 조그마한 설비업하고 있었다. 남편은 현장에 가고 늘 가계를 명옥이고 지키고 있었다. 공무원 교육원 길목에 있어서 교육을 가면 오며가며 만나곤 했다. 교육을 마치고 꼭 집으로 오라고 문자가 몇통이 와 있었다. 아파트 입구 들어서는데 낮익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우리가 어릴 때 가을겆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어올때면 골메운다고하여 찹쌀수제비를 끓여먹었다. 찹살과 멥쌀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방앗간에서 곱게 빻아 눈처럼 하얀 쌀가루를 한 대야를 이고 어머니가 사리문을 들어올때면 큰언니는 무쇠솥에 장작불을 피워 물을 끊인다. 익반죽을 하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동글동글 비벼 세알을 만든다. 크기도 모양도 다양하다. 할머니는 농사지은 햇들깨를 맷돌에 갈았다. 미역을 불려 참기름에 볶을때면 고소한 냄새가 담을 넘었다. 세알수제비를 먹는 날은 우리집 만의 특별한 이벤트였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한그릇을 비우면 몸도 마음도 곽 찬 느낌이었다. 언제나 찹쌀수제비는 추억속의 음식이었다.

 

수다 중에 내가 그것을 제일 좋아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그녀가 해준 것이다. 그 바쁜 중에도 쌀을 불려 빻아 세알을 만들고 미역을 불려 소고기와 들깨 가루를 듬뿍 넣어 우리 고향에서만의 독특한 맛을 재현했다. 나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여년 만에 먹어보는 고향의 맛 추억의 맛이었다. 행복했다. 각박한 도회지에서 이런 따뜻한 친구가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40여년전에 지현이게 받은 상처마져도 깨끗이 씻어주었다.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속이 훈훈해지고 행복해진다. 나는 그 일이 있고부터 우리집에 친구들이나 지인을 초대하여 음식 나누기를 좋아했다. 따뜻한 사람과의 한끼식사는 허전한 마음마져 채워주었다. 나도 그 친구처럼 누군가에 가슴에 따뜻한 사랑과 훈훈함을 심어 주고싶었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후배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때론 삭막하고 살벌한 직장생활을 슬기롭게 할 수가 있었다. 퇴직을 하여도 한끼 식사로 맺은 정은 끊이지가 않았다.

직장후배와 식사는 꿀같이 달콤한 시간이었다. 따뜻한 한끼의 식사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지난날의 추억에 더욱 아름답게 색칠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에 찬바람이 불어와도 우리의 골을 메우는 찰삽수제비 한그릇이면 그 겨울을 무탈하게 났던 것처럼 세상살이가 아무리 각박해도 명옥처럼 따뜻한 친구가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