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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왕관을 벗다

7월의 황령산은 뜨거운 숨을 내뿜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칠 때마다 며칠 전 친구에게 쏟아냈던 모진 말들이 가시처럼 되살아났다. 오르막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마음속 응어리는 발걸음보다 무거웠다.며칠 전 글수다 모임이 있었다. 평소 각별히 아끼던 친구 A가 가까운 친척에게 크게 상처받은 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집 리모델링을 믿고 맡겼는데, 처음 약속과 달리 터무니없는 추가 비용을 요구했고 공사도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그런데도 A는 그 친척을 원망하기는커녕 처음부터 계약서를 꼼꼼히 쓰지 못한 것과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때 제때 따지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상대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나의 인생글 2026.09.20

그가 머문 단풍나무

가을이면 나는 단풍 앞에서 가끔 걸음을 멈춘다.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잎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때 누구보다 뜨겁게 사람들 곁을 지키며 살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K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K를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오랜 세월 평직원으로 근무하다 동사무소 사무장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행정의 최일선인 동사무소에는 주민들과 부대끼며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당시 통장이었던 K는 나와 동갑내기로 유난히 손발이 잘 맞았다. 그의 든든한 도움 덕분에 나는 참 신명 나게 일할 수 있었다.세월이 흘러 내가 그곳의 동장으로 다시 부임했을 때도 K는 여전히 동네의 궂은일을 도맡고 있었다. 풍물패 회장이었던 그는 매년 정월대보름이..

나의 인생글 2026.09.08

인생의 성적표

‘횟집’ 안쪽 창가에 대여섯 명의 중년 여성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어릴 적 같은 시골마을에서 함께 자란 고향 친구들이다. 특별히 귀티가 나거나 눈길을 끌 만한 이도 없다. 그저 재래시장 어귀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얼굴들이다. 코로나로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모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세월을 메우기라도 하듯 잠시도 말을 쉬지 않았다. 이쯤 살고 보면 누구의 가슴속에나 소설책 몇 권쯤은 얹혀 있기 마련이다. 세월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도 달라졌다. 젊었을 때는 남편과 시댁 이야기가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 어느새 그 자리를 아들과 며느리, 손주 이야기가 차지했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도 어느덧 친정어머니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 맞은편에 앉은 H..

나의 인생글 2026.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