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글 65

영도다리

영도다리, 나의 20대를 기억하다 배현공 나의 20대는 하루에 시내버스가 두 번밖에 다니지 않던, 깊고 조용한 산골에서 시작되었다.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며 보낸 날들. 마주치는 얼굴은 늘 정해져 있었고, 창밖의 풍경은 사계절 내내 단조로웠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외롭지도, 허전하지도 않았다.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그와 함께한 시간은 오래된 시냇물처럼 잔잔했다. 특별한 이벤트도, 눈부신 순간도 없었지만, 일상 하나하나가 내겐 설렘이자 위안이었다. 산길을 나란히 걷고, 해 질 녘 고요한 마을을 함께 산책하던 시간 들. 세상은 조용했고, 우리의 사랑도 소리 없이 깊어져 갔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곁에 있는 그 사람 하나로 충분했던 시절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군인이 되어 부산으로 떠..

나의 인생글 2025.05.22

인연의 무게

배현공 평온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주변의 인연을 당연하게 여긴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속에 익숙한 얼굴들,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은 존재들을 우리는 별다른 의식 없이 지나친다. 하지만 인생은 예기치 못한 순간, 그 인연들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깨닫게 하는 놀라운 방식으로 다가온다.작년 가을, 남편과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스페인.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찬란한 햇살 아래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 수천 년 역사의 무게를 지닌 도시들,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정열적인 사람들. 하루하루가 감동이었고, 낯선 곳에서의 소소한 경험들마저 특별했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다름 아닌 인연의 깊은 울림이었다.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두바이 공항에서 경유 비행기를 ..

나의 인생글 2025.05.22

설거지와 스티커

배현공 새로 사온 그릇이 백여 개가 넘었다. 박스를 열자, 그릇들은 하나같이 반짝이며 고운 소리로 서로 부딪혔다. 나는 장화를 신고 설거지 시설대로 들어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 속에 손을 넣고 문지르다 보면 감각은 어느새 무뎌졌지만, 누군가 그 그릇에 따뜻한 밥을 담아 먹을 것을 생각하면 손이 절로 부지런해졌다.그녀는 내가 씻은 그릇을 정리해 말리는 일을 맡았다. 말없이 주고받는 손길 속에 일의 리듬이 생겼고, 그 조용한 호흡이 의외로 좋았다. 고된 노동이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잠깐 화장실에 갔겠거니. 하지만 그릇은 계속 쌓여가는데 그녀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나는 고무장갑 낀 손을 ..

나의 인생글 2025.05.22

혼자서도 괜찮다

배현공어느덧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참으로 속절없는 시간이다. 다시 찾은 대구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도시가 아니었다. 익숙할 줄 알았던 골목도, 기억 속에 또렷했던 거리도 내 눈앞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로 서 있었다. 택시 기사는 참 친절했다. 이 거리, 저 거리의 이름을 조곤조곤 설명해주는데, 나는 딴 세상 사람처럼 그저 창밖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내 여고 시절은 늘 배고팠다. 절대적인 가난 속에, 친구들의 새 운동화 하나에도 마음이 조그맣게 쪼그라들던 나날들.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은 그저 공납금과 쌀을 부쳐주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을 것이다. 그런 집안에서 학교를 졸업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큰언니와 고모님이 있었기에 나는..

나의 인생글 2025.05.22

요즘 젊은이들

요즘 젊은이들배현공 봄날, 합천 백리 벚꽃길을 걸었다. 부산여성문인회 회원들과 함께한 그 길, 맑은 하늘 아래 흩날리는 벚꽃잎이 마치 분홍빛 비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만개한 꽃나무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꽃이 한창일 때 사람들은 “이 짧은 순간을 즐겨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는 자신이 얼마나 찬란한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청춘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임에도 불안과 고뇌로 자신을 가두며,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활짝 핀 벚꽃 사이로 두 젊은이의 얼굴이 겹쳐졌다.며칠전 속이 편치 않았다. 무겁고 더부룩한 속을 달래려 시장을 걷다가, 우연히 죽을 ..

나의 인생글 2025.04.25

가족이라는 이름의 다이어리

가족이라는 이름의 다이어리 배현공이번 명절, 가족들과 함께 연극 바다마을 다이어리를 관람했다.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 카마쿠라에 살고 있는 세 자매가 오랜 세월 소식 없던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 버렸고, 미움도 오래전에 무뎌졌지만, 그곳에서 처음 만난 이복동생 스즈는 자매들의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결국 세 자매는 어린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이들은 점차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네 자매로 성장해 간다.연극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해, 상실과 갈등, 화해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파도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특히 배다른 자매라는 설정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피는 섞였지만,..

나의 인생글 2025.04.25

남편과 마이크

남편과 마이크배현공젊었을 때는 사소한 일에도 화도 자주 나고, 격하게 반응하곤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일에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넘겨버린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넓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아예 무덤덤해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남편이 마이크를 잡을 때다.저번 일요일은 남편의 공부담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평소 준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일이 많아서 미뤘나 보다 했는데, 발표를 한다고 했다. 나는 조금 불안했지만, 남편이 평소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저히 연마하고 준비되지 않은 것이 표가 났다. 말이 겹치고, 주제에서 벗어나며, 때로는 명확하지 않은 말을 했다. 내 남편이기에 더욱 크게 느껴졌는지도 ..

나의 인생글 2025.02.16

당신이 진정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이 진정 부처님이십니다.배현공  아주버님과 형님은 법 없어도 살 만큼 선하고 착한 분들이다. 그러나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의 일종의 사치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형님께서 남편인 아주버님의 열반을 당하여 마음이 바뀐 듯했다. 원불교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싶다고 하여 동진주 교당에서 지내기로 하였다그들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논 가장자리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셨다. 농사는 그들에게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삶의 근본이었다. 추석이나 구정에도 차례를 지내고 바로 논으로 향했다. 하루도 농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주버님은 매달 나오는 공무원연금과 농작물 수익금이 상당했..

나의 인생글 2025.02.07

금수저

금수저배현공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수저계급론'이라는 신조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 용어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한다. 수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이 아니라, 사람의 출생과 경제적 배경을 뜻하는 상징이 되었다.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다이아몬드 수저로 나뉘는 이 분류는 마치 우리의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이런 계급론을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보았다. 동사무소 사무장을 맡고 있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직원들이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는 가운데, 한 직원이 손에 신문지로 감싼 큼직한 뭉치를 들고 나왔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그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여성이 좋은데 ..

나의 인생글 2024.10.28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배 현 공 내가 다니는 종교에서는 여성회라는 단체를 통하여 세계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고자 만든 단체이다. 그곳에서 가끔 해외 훈련을 떠난다. 나는 그동안은 직장생활에 매여 10여 년 전에 아프리카를 다녀오고는 함께 하질 못했다. 이번에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동유럽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종교인 32명과 함께 13박 14일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지 중에 프랑스 노르망디가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노르망디는 푸른 바다, 하얀 절벽, 그리고 구불구불한 해안선은 마치 자연이 손수 그려낸 작품같았다. 이곳의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깊은 이야기를 ..

나의 인생글 202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