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
배 현 공
내가 다니는 종교에서는 여성회라는 단체를 통하여 세계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고자 만든 단체이다. 그곳에서 가끔 해외 훈련을 떠난다. 나는 그동안은 직장생활에 매여 10여 년 전에 아프리카를 다녀오고는 함께 하질 못했다. 이번에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동유럽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종교인 32명과 함께 13박 14일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지 중에 프랑스 노르망디가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노르망디는 푸른 바다, 하얀 절벽, 그리고 구불구불한 해안선은 마치 자연이 손수 그려낸 작품같았다. 이곳의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파리의 분주한 거리에서 벗어나, 노르망디의 평화로운 풍경 속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이 유서 깉은 곳에 우리 종교에서 운영하는 노르망디 한운안 무시선 선센터가 있었다.
13,000여 평의 평지에 새파란 잔디가 융단을 펴놓은 듯 매끈하게 깔려 있고 눈앞에는 저 멀리 지평선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곳곳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무리 지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하얀 건물을 휘감고 피어있는 빨간 장미꽃이 마치 동화 속에 들어 온 듯했다.
시차 탓일까, 새벽 4시에 눈을 떠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도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나는 동반자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세상은 아직도 어둠속에 싸여있었다. 휴대전화 플래시를 밝혀 법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촛불을 밝혔다. 촛불은 제 몸을 태워 큰 법당 일부를 희미하게 밝혔다. 나는 방석을 끌어당겨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부처님과 마주 앉았다.
오늘이 6월 6일, 우리나라에서는 현충일이고 이곳 프랑스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난 지 80주기가 되는 그날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여 갖은 고행을 당할 때 연합군이 각고의 노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교두보가 되었다고 한다. 디데이(D-DAY)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때 희생된 군인들이 작전 당일인 6일 하루에 일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도 현충일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하얀 옷을 입고 읍내 현충원에 다녀오시곤 했다. 그날만큼은 다른 가족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친정어머니가 16살에 결혼해서 위로 두 명을 딸을 낳았을 때 육이오 전쟁이 터졌다. 먼저 아버지께서 군대 영장을 받았다. 전쟁이 한창때 입대는 죽음과 즉결되었다. 장손에게 시집와서 대를 이을 아들도 낳지 못하고 남편이 전쟁터를 끌려가게 되었으니, 새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삼촌께서는 동생들이 있는데 형님을 전쟁터로 보내겠냐며 엄마를 안심시켰다. 새벽같이 일어나 그날 쓸 물을 물지게로 길러 놓고 직장인 경찰서로 출근을 한 싹싹하고 착한 시동생이었다. 몇 번의 가족회의 끝에 삼촌이 아버지의 영장을 가지고 군대로 떠났다. 몇 달 후 전사를 했다. 삼촌의 영장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군대에 갈 때는 휴전이 될 때여서 무사했다. 전쟁은 우리 집안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 남편의 죽음을 대신한 시동생, 두 여성은 평생을 한집에 살면서 고함 한번 담벼락을 넘지 않고 오손도손 살았다. 가족 누구도 삼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렇게 삼촌은 모두에게 잊혀갔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호호 할머니가 된 어머니께서 대전 현충원엘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삼촌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고 몇 달을 못 버티시고 세상을 떠났다.
6월 6일 현충일 내가 노르망디에 온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늘 만큼은 나를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날 희생된 분들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 기도하리라. 죽비에 더욱 힘을 가해 손바닥을 내려쳤다. 한참을 앉아 명상에 빠져든다. 멀리서 들리던 풀벌레 소리도 잠시 멈추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념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세상에 태어나서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일만 명의 젊은 군인들, 자식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부모님, 젊은 아낙의 통곡 소리,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모두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는 퇴색된 사진 속에서 마주한 삼촌도, 평생 한을 누르고 사신 할머니도 어머니께서도 계셨다.
볼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명상이 끝난 뒤 독경을 시작하였다. 목이 메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분들의 넋을 위로할 유일한 방법은 마음을 다해 독경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어쩜 그것이 오늘 나를 이곳에 오게 했을 것이다. 갑자기 나는 무거운 사명감이 느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배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일원상 서원문, 반야심경, 참회문, 청정주, 금강경 등 독경 삼매경에 빠졌다. 향을 사르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희생된 일만여 명의 젊은 군인들 그로 인해 고통받은 모든 분을 향하여 다음 생에는 갈등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태어나서 이승에서 못다 한 꿈, 사랑, 평화 다 누리기를, 다시는 이 아름다운 곳에 그런 비극이 없기를, 영원한 평화가 지속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법당의 문을 여는 순간 어둠은 사라지고 저 멀리 안개 속에 묻혀있는 수평선이 벌겋게 물든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이 빠져나간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그날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르망디의 아침해가 요란한 빛을 뽐내며 떠오른다. (202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