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글

절박한 인연

늘 은혜로운 2024. 10. 26. 11:32

그라스의 여인

 

배현공

60대 초반, 어느새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젊었을 때는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도 기억이 뚜렷했지만, 요즘은 간혹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예를 들면 방금 먹은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다가 갑자기 그걸 왜 들고 있었는지 고민하는 순간들. 자주 만났던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건망증은 나에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탈함을 안긴다. 가끔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건망증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경험담을 나누며 박장대소도 하고 어떤 일이든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내 친구의 이야기이다.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이 지하철 서면가나요?” 하고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친절하게 할머니 잘못 타섰습니다. 이 지하철은 반대 방향으로 가요.”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할머니는 혼미백산하여 아이구, 큰일 났네.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차를 잘못탔다고 어서 내려야 한다며 조용했던 지하철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신사 분이. “이 차 서면 가는데요친구의 머릿속 지우개가 오작동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상황을 떠올리자, 웃음보가 터졌다. 건망증 하면 나도 물러설수 없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랫동안 모임을 같이한 회원들과 함께 동남아 여행은 갔었다. 처음 가는 해외 여행이라 한컷 부풀어 있었다. 동남아는 그 뜨거운 햇살과 이국적인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제 이야기는 단순한 여행의 즐거움을 넘어, 나의 건망증을 일깨운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몇 차례 모여서 준비물을 체크했다. 그 나라의 기후와 문화에 맞는 옷과 소품을 챙겼다. 나도 많은 준비를 하였다계절에 맞는 옷신발모자썬그라스 등특히 썬글라스는 발품을 팔아 제법 그럴듯한 걸로 준비를 하였다

여행은 모든 것이 신비로웠고 !하하호호를 연발하며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시간은 빨리 지나가 버린다여행의 막바지에 들 무렵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선글라스가 없어졌다안경을 담은 빈집만 남았고 그 속의 주인공이 사라졌다어디에 두고 왔을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그 중요한 부분을 지워버렸다주변을 샅샅이 살폈다일행들이 무엇을 그렇게 찾냐고 같이 찾아보자 하여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모두들 열심히 찾았다. 지나온 관광지를 뒤집어 보고 검색하듯 모든 곳을 뒤졌지만 썬그라스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때 한분이 형수님이 지금 끼고 있는 썬그라스가 설마 찾고 있는 것은 아니죠.  순간, 일제히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나는 당황하여 어머, 내가 지금 썬그라스를 끼고 있나요?” 그 순간 주의는 빵 터졌다. 장내는 웃음 바다로 변했다. 며칠 동안 계속 쓰고 있어서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선글라스를 끼고 썬그라스를 그토록 찾아헤멨던 것이다. 사건 이후로 나는 "그라스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내 건망증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행을 회상하면 썬그라스 이야기가 단연 먼저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어제도 지인의 기타 연주회에 가는 날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단정한 원피스를 꺼내 입고, 기분 좋게 가방을 바꾸며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티켓을 챙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남편은 식사도 거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티켓을 찾아왔어야 했다.

건망증과의 동거는 많은 불편함을 주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면 내머리속은 얼마나 복잡할까, 상상만하여도 숨이 막힌다. 결국 건망증이란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잊고, 다시 기억하고, 또 잊고. 그것은 지나간 세월이 주는 특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다. 가족의 웃음, 친구들과의 소중한 기억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 이 순간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메모 하는 습관을 들인다. 휴대폰 달력에 그날에 내가 했던 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한다. 꼭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일기로 적는다. 그렇게 나만의 소중한 기록들을 만들어가며, 잊혀짐 속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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