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글

물고기 천도재

늘 은혜로운 2024. 10. 26. 11:30

잔인한 취미

배현공

현대 사회에서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바쁜 일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취미생활이다. 취미는 단순한 오락이나 여가 활동을 넘어서, 우리의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정년 퇴임을 맞이한 순간,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의 고된 일상이 끝났다는 해방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두려움도 스친다. 나에게도 그랬다. 오랜 세월 동안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던 일상이 갑자기 사라지니, 마치 나 자신이 한 편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늘에 해가 떠 있는 한 출근을 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불어도 나의 출근은 쉬지 않았다. 오히려 재해대책으로 비상이 걸려 밤낮도 없었다. 늘 시간 가난에 허덕였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있으면 그날은 무엇을 하면 보낼까,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렜다.

이제는 일 년 내내 쉬는 날이다. 주변에서는 활달한 성격에 활력이 넘치는 내가 어떻게 그 무료함을 견딜지 은근히 걱정을 하는 눈치이다. 중년의 여성들이 많이 겪고 있는 갱년기장애와 우울증도 남아도는 시간이 그 주범이다. 이것저것 취미생활을 권했다. 그중에서 그림을 전공한 친구가 밑그림이 그려진 도화지와 색칠 도구들을 선물했다. 그림 공부를 해보라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혼자 하기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이내 허리가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한 페이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우리는 30대 후반에 시골의 평화로운 곳에서 도회지로 전근을 왔다. 모든 것이 물설고 낯설었다. 이곳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취미생활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편의 주변 사람들이 낚시를 즐겨 했다. 남편은 불자로서 마음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자연을 느끼고 고요함을 찾는 것을 좋아하지만, 낚시라는 취미는 결코 그와 가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위해 낚시에 동참해야 했다. 모든 것이 직장과 친구들, 사회적 연결망 속에 얽혀 있었다. 낚시를 즐기지 않는 남편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고립을 의미했다.

불자인 나는 이런 남편을 이해는 했지만 그 많은 취미 생활 중에 왜 남의 생명을 거두는 낚시일까 늘 못마땅했다. 불교에서 살생하지 말자는 첫 번째 계문이다. 낚시를 떠나는 날이면 남편은 실제로 낚시는 하지 않고 분위기만 맞춘다고 했다. 나는 실수 한 척하며 어망을 뒤집어 잡은 고기를 풀어주라고 당부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방생하고 오라고 조언했다. 남편은 꼭 그렇게 하겠다며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어느 날 남편이 바다낚시에서 돌아왔다. 바다의 깊은 푸름을 품고 돌아온 그는 손에 물고기를 쥐고 있었다. 반짝이는 비늘, 생명력 넘치는 눈, 그리고 그들이 한때 헤엄쳤던 바다의 자유로움이 떠오르는 순간, 이제는 그 생명이 끊어진 채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낚시가 잘 되어 고기를 나누어 온 것이다. 죽은 물고기들은 싱크대에 쏟아져 있었다. 나는 그 물고기들이 죽어갈 때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염불을 외우며, 물고기들의 영혼이 편안히 다음 생으로 나아가길 기원했다. 전생에 어떤 업장으로 이곳에서 이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무지에서 온 것이라고, 용서하라고. 다음 생에는 꼭 사람의 몸을 받아오라고 빌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기도뿐이었다. 작은 의식이라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남편은 거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무엇을 그렇게 중얼거리냐고 소리쳐 물었다. 당신 일행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부디 내 남편을 용서하고 다음 생에는 꼭 사람의 몸을 받아오라고 빌었어요. 남편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낚싯대를 정리하였다. 집안 어느 구석에도 낚시에 관련된 도구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퇴임 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은 무수히 많았지만, 나는 글쓰기가 내 적성에 가장 잘 맞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주제를 선택해야 할지 처음에는 막막했다. 하지만 나의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일상에서 느낀 작은 행복, 직장생활에서 겪었던 소중한 경험들,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의 꿈들.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과거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치유도 경험했다. 일상 속의 작은 사건들이 모여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남편도 건전한 운동으로 취미를 바꾸었다. 함께 등산도 하고 골프도 즐긴다. 취미생활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나로 거듭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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