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무님
배현공
따뜻한 봄기운을 받으며 황령산을 올랐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벗어나, 이곳에 오면 숨이 깊어지고 생각이 맑아진다. 내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들도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가벼워진다. 정상에 서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작아지는 듯하다. 도심의 분주함과 소란이 멀리서 수면 위의 파문처럼 잔잔해진다. 산에서 내려올 때면, 무언가를 버렸다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진다. 아마도 황령산은 그저 산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짐을 덜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나에게는 황령산 같은 사람이 있다. 30대 초반, 나는 작은 시골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모든 것이 나에게 처음 맡은 역할들이다. 여유란 그늘에 가려진 지 오래였고, 언제나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권유로 원불교 교당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남편을 따라간 것뿐이었지만, 교당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내 마음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차분한 공간,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람들, 그리고 평화로운 기운이 나를 감쌌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학업을 마치고 처음 발령을 받아 온 새내기 교무님이었다.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길을 막 시작하려던 때였고, 젊음의 열정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 같던 시절이었다. 나와 같은 또래인데도 그의 모습은 세상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천사와 같았다. 처음 본 순간 어찌나 청초했던지, 마치 여름날의 맑은 하늘처럼 투명했다. 나에게는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를 만나면 나는 마치 따스한 햇살 아래 서 있는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늘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의 모든 아픔이 그의 손길을 통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로 인하여 종교에 입문하였다.
우리는 서 있는 위치는 달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시골은 마치 젊음의 감옥과도 같았다. 주변에는 고요한 풍경과 농작물만이 있었고, 문화시설은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고 어디서나 젊음의 끼를 발휘할 수 있는 도시에서의 삶은 이제 먼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런 열악한 환경 때문인지 우리는 코드가 맞은 사람에게 더 끌렸을 것이다.
그렇게 진한 만남도 잠깐, 그는 서울로 나는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가끔 그를 만나러 서울에 갔었다, 3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는 40대에는 외국에서 살았다. 외국에서의 선교활동은 단순히 한 사람의 사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의 힘이 필요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지원해 줄 이들이 많아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마음공부 한 교무님이라도 낯선 나라에서의 삶은 그에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안겼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언어, 그리고 주변 환경에서 느꼈을 외로움 등
나는 그 시기, 직장에서는 중견 사원의 책임을 다해야 했고, 늦깎이 대학원 공부로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이었다. 그가 귀국하면 어쩌다 한 번씩 만났다. 늘 밝고 씩씩했고 어려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조금의 경제적 도움도 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나 중심으로 얼마나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우리는 너무도 먼 곳에서 서로의 길을 가고 있었다. 30여 년 동안 그와 만난 것은 열 손가락에 꽂는다. 그러나 내 인생의 큰 구비들은 늘 함께했었다. 승진에서 탈락하여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을 때 서툰 운전으로 그가 있는 도시로 달렸다. 인생에 있어 비상할 때도 추락할 때도 나는 언제나 그를 향해 달려갔었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황령산같이 늘 그곳에 있었다. 주로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가끔 나에게 질문을 툭 툭 던질 뿐 법문을 설하거나 바른 인생길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었다. 잠깐의 만남도 나의 영혼이 맑아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남편의 바람기로 힘겹게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늘 남편을 원망했다. 얼마 전에 전화로 거의 한 시간 정도 하소연을 했었다.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째 듣고 있다. 긴급한 일정이 있었는데 중간에 말을 끊을 수도 없고 몹시 난처했다. 그 순간 그분이 생각났다. 내가 끊임없이 하였던 하소연은 누구라도 겪는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분의 처지에서 보면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급하게 처리할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그 말들을 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었을까,
그의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늘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힘을 얻었다.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친구에게 그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친구가 남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감정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친구는 내게 모든 아픔과 감정을 쏟아놓으며 조금씩 치유가 되는 듯 보였다.
세월이 흐르고, 돌고 돌아 그와 60대에 다시 만났다. 세월의 흐름은 종교인도 비켜 가지 못했다. 그의 곱던 얼굴은 주름이 지고 눈가에는 깊은 내력이 서려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의 모습도 변했지만, 그가 가진 믿음과 사랑은 여전했다. 그의 미소 속에는 세월이 남긴 깊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다시 만난 그는 교단의 중심에 선 중견 종교 지도자로, 나는 큰 단체를 이끄는 단체장으로 활발한 종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의 대화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다.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성장하였지만,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심과 열정이 다시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빛나는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분은 바로 최시현 교무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