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글

좋은 인연

늘 은혜로운 2024. 9. 13. 20:49

 좋은 인연

배 현 공

나는 10여 년 넘게 다닌 시골 고향 면사무소에서 부산 초량사무소에 전근을 왔었다. 농촌에서 생활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가족과 이웃들이 서로를 잘 알고 지내는 그곳에서는 하루하루가 천천히 흘러갔다. 그곳에서의 일은 예측 가능하고, 대면하는 주민들은 항상 친근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도회지로 오면서 내 삶은 급격히 변화했다. 90년대 초반, 부산역에서는 데모꾼들의 피 끓는 절규가 이어졌다부산항에 외국 군인을 실은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텍사스 거리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가게 앞에는 큰 대야에 디딤돌만 한 얼음이 놓이고 그 위에 맥주와 위스키가 수북이 쌓였다. 호객행위를 하는 반나체의 여인들과 술에 취한 외국 군인들, 모두가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내가 상대하는 민원인들이 주로 시장 상인들과 부산역 노숙자들이 많았다그들의 대화 속에는 욕설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고, 갑작스러운 고함에 심장이 오므라들 것 같았다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출근하였다그렇게 무섭던 사람들이 조금씩 적응이 되고 보니 따뜻하고 나름 정도 많았다익숙해질 무렵 구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으로 동사무소로 업무 지도를 나갔었다. 어색했고 이해가 되지 않은 것들이 이었지만 도회지는 그런가 보다 했다. 돌아오는 길에 무얼까 이 싸 아한 분위기무거운 침묵만이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직급은 아래인 J 씨는 굳은 얼굴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직급도 나이도 아래인 K는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듯했다. 모두가 침울한 분위기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무엇이 있는데 나 혼자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K가 입을 열었다아까 사업소에서 밤색 양복을 입은 말끔한 신사를 보았냐고 물었다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얼굴에 약간의 비웃음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분이 팀장이라고 했다집이든 관공서이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최소한 아는 척은 한다더구나 상부 기관에서 오지 않았던가

우리 가족은 남편이 부산시 직장 이동으로 이산가족의 위기에 있었다남편은 기술직이어서 같은 직의 공무원이 부족한 부산시에 쉽게 전입할 수 있었지만 행정직이었던 나는 부산광역시로 전입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만큼이나 어려웠다확실한 배경이나, 부산시에 근무하는 같은 직급의 직원이 서로 바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대도시에서 첩첩 산골에 누가 오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이 전입한 지 1개월도 채 되지 않아 부산시에 근무하는 남자 직원이 내가 있는 시골로 전출을 오겠다고 했다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약혼자가 여고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사립학교라 약혼자의 이동이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서로 바꾸었다. 그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엄청난 배경이 있는 줄로 오해했다. 당당하고 늘 웃음으로 대했던 것이 배경만 믿고 날뛰는 오만방자한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그 팀장은 많은 직원들 앞에서 나에게 최대한 모욕을 준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상처는 깊어만 갔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어디서든 그 불편한 감정이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인간관계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새벽에 일어나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그와의 관계가 좋아지기를 기도했었다. 기도를 시작하고 나면 내 무엇이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반성도 하게 된다. 기도란 무엇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새벽에 일어나 그 팀장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올렸다. 몇 달 후 기도의 덕분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그 팀장이 나에게 사적으로 부탁할 일이 생겼다그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행사하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장비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벤트 회사가 거의 없었다. 나는 국가에 이익을 주는 단체이기에 사소한 장비를 빌려주어도, 빌려주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팀장의 입장은 달랐다. 수십 년 근무했던 직장에서 사소한 장비 하나 빌리지 못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나에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옆에 직원을 통하여 장비를 구하는 데 도움을달라고 전해 왔다. 처음에는 내게 그렇게 모욕감을 안겨 주었던 그가 어떻게 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나는 당장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요청에 응했다. 비록 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마치 내 일인 양 꼼꼼히 챙겨 확실하게 도움을 주었다그의 팀장의 최면을 최대한 세워 주었다. 다음날 까만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 팀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나는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진정한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어디서든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었고 십수 년을 좋은 선후배로 서로의 지원군이 되어 척박하기만 했던 도시 생활에 온기가 되었다.

시골 면사무소에서의 평화롭던 시절이 그립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처음에 느꼈던 두려움과 불안은 이제 새로운 도전의 발판이 되었고, 이곳에서의 경험들은 나를 더 넓은 시각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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