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꽃으로 피어나리
배 현 공
우리는 삶이란 대지에 무수한 인연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간다. 에어컨 실외기 옆에 한 뼘의 작은 공간에서 알을 품고 웅크리고 있는 비둘기, 나의 손길에 목숨을 맡긴 베란다의 화초들 까지도 어느 생 인가 내가 뿌린 인연의 씨앗들이다. 며칠 전에 특별한 손님이 오셨다. 작은 바구니속에 노란 장미, 흰장미, 카네이션, 거베라 들국화 등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태어나 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여수회 도반들의 아름다운 마음도 같이 왔다.
따뜻한 사람의 향기가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봄날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른 행복에 잠시 온몸을 맡긴다.
아름다운 인연의 꽃들이 피어나야 사람 꽃도 활짝 핀다.
우리가 뿌린 인연의 씨앗은 어느 때는 달콤하게 어느 때는 잔인하게 철도 없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꽃은 피고 진다.. 생에 있어 넘치는 기쁨도 절절한 슬픔도 모두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배님 나 죽을 것 같아요. 잠도 오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요. 직장 그만두고 싶어요.” 승진에서 탈락한 후배의 말이다. 초췌한 몰골에서 그의 고통이 느껴진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남 보다 앞서 갔고 잘 나가던 후배였다. 이기고만 살아서 지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사가 고해의 바다가 아니던가. 저마다의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는 다 있는 것이다.
최고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직장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진다. 어떤 분은 연륜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정통성을 주장한다. 어떤 분은 젊고 활동성 있는 사람이 능력도 있다 하여 까마득한 후배들을 요직에 앉힌다. 선배공무원은 죽음 보다 더한 묘멸감을 느꼈야 한다. 지휘관이 바뀌면 음지와 양지가 뒤바뀐다. 눈치 백 단으로 의리보다는 실속으로 노선을 잘 갈아타는 이는 살아남는다..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결정적인 날 큰 아이를 떠나보내는 엄청난 일을 겪었다.. 아이 잃은 아픔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승진하고는 거리가 먼 한직으로 밀려났다. 엎어지면 밟아주는 사이라고 친구들과 농담으로 오갔던 말이 가슴에 꽂힌다. 남편은 명예퇴직을 권했다. 그곳에서의 악몽을 잊고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기는 바란다고 했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 고통 역시 언젠가 내가 뿌린 인연이 씨앗을 것이다.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다. 이겨내고 싶었다. 나에게 이토록 큰 시련을 주는 것은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새벽에 일어나 몸과 마음을 정하게 하고 선을 하며 참회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더 가지지 못해 언제나 목말랐고 욕망의 그릇은 채울수록 더 깊어져 간다..
불교방송에서 하는 108배를 따라 하며 절의 의미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방으로 허트 진 마음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는다. 아들의 대한 그리움도 직장의 분한 마음도 앞날의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졌다. 업장이 녹아내리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가진 것이 많다. 내 삶의 정원에 은혜의 꽃이 피었다. 지금 여기가 낙원이고 극락이다. 뿌리까지 얻어 붙었던 웃음꽃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든다.
그토록 붙잡고 매달려 있을 때는 얻지 못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나니 저절로 이루어진다. 내 인생의 안개가 걷혔다. 눈부신 태양이 나를 맞이한다.
지난날의 경험을 되살려 후배에게 참회의 기도를 권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이 승진이 있었다. 네가 잘 나갈 때 승리의 기쁨으로 행복을 노래할 때 네 뒤에선 동료 선배들이 꼭 지금의 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침 불자라 말이 통했다.
후배는 훌륭한 지휘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꽃이 되고 싶어 한다. 돗 보이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내가 돗 보이려면 누군가는 몸을 낮추어 밑에 깔려 주어야 한다.
내가 빛나는 주인공이 되려면 누군가는 하찮은 조연의 역할을 맡아 주어야 한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화려한 장미의 인생이 아니라 들꽃의 삶에 지금은 감사한다. 몇몇 사람의 기쁨이 되기 위해 몸이 잘리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돗 보이려는 긴장감에 마음 조이지 않아도 된다. 소중한 인연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아도 된다. 여유자 적하며 순조롭게 한평생을 산다. 지나가는 많은 나그네의 얼굴에 미소를 심어준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여수 회의 회원님들 나의 도반이자 친구들이다.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인연들이다. 사내 진미로 배가 부를 때는 그들의 존재는 눈에도 가슴에도 없었다. 절박한 굶주림에 한 공기의 밥은 생명을 살린다. 내 생에 가장 슬플 때 묵묵히 나의 곁을 지켜주었던 인연들이다. 화려한 장미는 아니다. 나와 같은 들꽃들이다. 그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긴 인생길에 도반으로 친구로 먼 길을 함께 갈 소중한 인연들이다. 우린 수많은 생을 만나 왔을 것이다. 도반으로 만났으니 분명 부처님 인연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고 싶다. 태어나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