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보금자리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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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도 그랬다. 남편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나 가진 것은 없었다. 우리 부부는 시골집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말단 공무원이라 봉급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하니 몇 해가 지나자 조그만 아파트를 장만해 꿈에도 그리던 내 집을 갖게 됐다. 그때의 행복감이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 행복 뒤에 올 엄청난 내 인생의 소용돌이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새집을 장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우리의 보금자리가 압류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던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의 쓰임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시어머니, 시아주버님, 어린 두 아들 등 6명의 우리가족은 어디로 가야하나! 수도시설도 없는 부엌, 비 오는 날은 화장실에서 우산을 써야 했던 시골집 셋방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남편이 사업하는 친구에게 빚보증을 서서 일어난 결과였다. 원망심에 나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때는 막 원불교에 입교해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경계 앞에서 아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의 힘으로 극복해 보기로 하고 틈만 나면 경전을 읽고 교당에 홀로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대종사님께 나의 억울함을 고하고 또 고했다. 당시 보았던 많은 법문 중 '음조와 음해는 각자의 지은바'라는 〈대종경〉 인과품 15장 법문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고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지은 업일 것이다. 언젠가 갚을 업이라면 지금 갚자 생각하니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생겼다. 우선 빚을 내 압류된 집을 건졌다. 집을 살 때 남은 빚과 합해지니 감당하기 힘든 큰 빚이 됐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다. '이 경계를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시길, 그리고 나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부도낸 친구를 위해서도….'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남편의 친구는 부도난 사업을 다시 일으키게 됐고, 우리는 무사히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왜 법신불 사은님께서 지옥을 맛보게 하셨을까?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 그때부터 나는 내 종교 남의 종교 가리지 않고 후원하고 어디서든 좋은 일에 쓴다고 하면 계산하지 않고 기부하며 현실에서의 재물뿐만 아니라 진리에도 저축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인 구청에서 여성교육업무를 담당할 때 이주여성 한글교육을 실시했다. 7~8여 년 전 사회적으로 이주여성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부족할 때라 어려움도 많았다. 낯설은 이국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나는 사적인 모임에 갈 때마다 그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남편의 직장부부 모임에서 부인들이 그들에게 이모가 되어주겠다고 나섰다. 매월 3주째 수요일에는 이모들과 이주여성 50여 명이 모여서 전통음식도 만들고 비즈공예도 하며 따뜻한 봄날에는 손잡고 꽃놀이도 나간다. 그렇게 지금까지 6년째 지속되고 있다. 부푼 꿈을 안고 이국 멀리 머나먼 나라에서 온 어린신부들, 그들도 이제는 나에게 소중한 가족이 됐다. 가끔 나는 뒤돌아본다. 내 종교 원불교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행복, 이 기쁨 누가 나에게 줄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큰 바위 천 길 낭떠러지를 만날 때마다 그것을 딛고 한 단계 더 올라설 수 있는 힘을 준 내 종교 원불교! 한없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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