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글

설거지와 스티커

늘 은혜로운 2025. 5. 22. 22:19

배현공

 

새로 사온 그릇이 백여 개가 넘었다. 박스를 열자, 그릇들은 하나같이 반짝이며 고운 소리로 서로 부딪혔다. 나는 장화를 신고 설거지 시설대로 들어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 속에 손을 넣고 문지르다 보면 감각은 어느새 무뎌졌지만, 누군가 그 그릇에 따뜻한 밥을 담아 먹을 것을 생각하면 손이 절로 부지런해졌다.

그녀는 내가 씻은 그릇을 정리해 말리는 일을 맡았다. 말없이 주고받는 손길 속에 일의 리듬이 생겼고, 그 조용한 호흡이 의외로 좋았다. 고된 노동이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잠깐 화장실에 갔겠거니. 하지만 그릇은 계속 쌓여가는데 그녀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나는 고무장갑 낀 손을 멈추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 두 번, 점점 더 크게. 대답은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언니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녀를 찾으러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언니의 말.

법당에서 스티커 붙이고 있더라.”

그 말에 뒷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함께 하던 일을 말도 없이 멈추고 다른 자리로 옮긴 것도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대답 한 번 없던 게 더 이해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릇을 씻었다. 거품과 물 사이로 끓어오르던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감정은 물에 닿지 않고, 손끝에서 마음속으로만 점점 더 부풀었다.

결국 혼자서 그 많은 그릇을 다 씻고 나서야 법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장면은 더 낯설었다. 그녀는 다른 법우 두 명과 함께 웃고 있었다. 스티커를 한 장씩 떼어 작은 봉투에 붙이며, 마치 처음부터 세 사람이 한 팀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 두 사람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크게 다투어,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던 사이였다. 내가 놓친 장면이 있었던 걸까. 혹시 나만 다른 시공간에 있었던 건 아닐까.

스티커 붙인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나는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그녀는 씩 웃기만 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옆의 법우가 나직이 말했다.내가 가지 말라고 했어.”

그 한마디에 속이 다시 뒤집혔다. 그 법우는 평소 나와 다정한 사이였다. 내가 부르는 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는 말일까. 겉으론 친한 척하면서도, 사실은 내게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을 싫어하던 사람들에게 조금 다정함을 받자 그 편에 서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아니면나 혼자 너무 멀리 간 생각일까.

직장에서만 인간관계가 복잡한 줄 알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조건 없이 손을 보태며 봉사하는 이곳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종교단체라고 해서, 봉사활동이라고 해서, 사람이 모인 곳이 특별한 건 아니었다. 결국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상처받기도 하고,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경계하기도 하고, 오해하고 때론 외면하기도 하는 그래서 더 인간적인 곳.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오늘은, 그릇보다 마음을 씻는 일이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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